우리의 사랑은 특별한가.

수천번을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헤어지잔 한마디 말에 끝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이 지속되고 있을 때 우리의 사랑 만큼은 타인들의 그것과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은 타인의 사랑과는 다른 특별함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특별함을 가지기 위해선 어떠한 모습이 돼야 하는 것일까. 

 

사랑이란 정형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의 모습은 사람의 숫자에 정비례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보여준 집착도 사랑의 한 모습이며, 영화 <나쁜 남자>에서 조재현 역의 주인공이 보여줬던, 비정상적이라 할 만한 사랑의 모습 역시도 사랑의 한 형태다. 이처럼 사랑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에는 동일한 특성 또한 존재한다. 사랑의 완성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의 증진과 감소라는 생각을 통해 새로운 윤리학을 제안한 바 있다. 코나투스란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그 사물의 본질을 말한다. 인간에게 코나투스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힘이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존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이유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자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코나투스의 증진은 우리를 보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기쁨과 쾌감을, 그리고 코나투스의 감소는 우리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슬픔과 우울을 불러온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증진하는 관계는 윤리적이며, 감소시키는 관계는 비윤리적이라 말했다. 사랑의 윤리는 바로 이 점과 맞닿아 있다. 


사랑은 우리의 코나투스, 즉 자신을 보존하려는 힘를 증진시키는 활동이다. 사랑을 통한 기쁨 만큼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고양된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일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랑의 완성은 우리의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사랑이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이 될 때, 그래서 코나투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을 특별한 것이라 간주할 수 있다.


코나투스를 증진하도록 하는 사랑의 기쁨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준다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그들은 그들의 힘, 그들의 부, 그들의 능력을 경험한다. 이러한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의 경험속에서 그들은 매우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랑을 준다는 것으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증진시키는 행위라 말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지속하고 있는 사랑이 특별하기 위해선 사랑을 통해 우리가 얻는 기쁨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 돼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이르기 위해선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사랑에 거듭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사랑을 주는 행위를 통해 얻는 기쁨보다 슬픔이 크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도 우리 중 다수는 우리가 지속하고 있는 사랑이 특별하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사랑이란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을 동반하며 우리의 코나투스를 고양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특별하다고 믿는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쁨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또 한번의 이별을 통해 특별한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특별함은 결국 타인이 아닌 나를 통해,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 기쁨을 극대화 할(코나투스를 극대화)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코나투스를 최고조로 고양하지 못하는 사랑, 그러한 사랑에 특별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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