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합의문, 자화자찬할 일 아니다.



"미국도 중국도 막혔다. 국제적 고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활로는 남한에 있다." 북한의 입장이 이러할 것이다. 북한은 그간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었다. 혈맹이라던 중국마저 경제적인 이유로 또는 북한의 거듭된 망동을 이유로 그들을 멀리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3번이나 방문하는 사이, 김정은은 단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하지 못한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국제적 고립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다른 나라들과도 관계를 회복하는 것. 하지만 그간 우리나라도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다. 북한이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협력은 없을 것이라며 5·24조치를 고수했고, 북한이 도발하면 원점타격을 할 것, 철저히 응징할 것이란 말을 거듭했다. 


심지어 박 대통령은 내년에 갑작스런 통일이 올 수도 있다며 북한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을 알고 있었다. 말은 강경하게 하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전면전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임기반환점을 앞둔 박근혜 정부에게는 북한과 관련된 성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뢰도발과 DMZ 포격사건으로 시작된 남북 간의 대치상황은 최근 북한의 준전시체제 공표와 함께 전쟁 직전까지 나아갔다. 북한은 스스로 초래한 남북경색국면에서 우리 정부에 먼저 대화를 제의했고, 지난 25일 남과 북은 합의문을 발표하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종료시켰다. 


합의문에는 이산가족 상봉과 민간협력을 위한 논의를 하겠다는 내용이 담기며,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유효함을 입증했다. 이처럼 전쟁 위기를 극복해낸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말도 반갑다. 하지만 이번 합의의 과정에서 정부가 보인 모습은 무능했다. 


먼저 그간 강경한 대응을 해가며 지뢰도발 사건과 DMZ 포격 사건을 초래한 것에는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 통일대박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대북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우면서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를 위한 노력에 소홀했다. 북한의 사과를 전제조건으로 하며 강경한 대응만을 고수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제적 고립으로 궁지에 몰린 북한을 더욱 코너로 몰아세웠던 셈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게 마련이다. 북한은 결국 도발을 감행했다. 정부는 그간 원점타격, 철저한 응징을 약속했지만 북한의 도발 국면에서 이들 약속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하고, 야산에 경고사격을 하는 정도가 대응의 전부였다. 


그러면서 정부는 북한이 도발을 재차 감행하자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합의를 이루었다. 북한이 도발에 대한 유감표명을 약속하자 6개 항목에 대한 합의를 한 것이다. 전쟁을 방지한 점은 높게 사지만 유감표명만으로 북한과의 합의를 이룬 것은 굴욕적이다. 이는 정부의 기존 입장과도 배치된다.



이웃에 사는 건달이 우리 가족 구성원 2명의 발목을 절단하고 우리 집을 향해 포격을 했다. 그후 대화를 하자며 나서 사과가 아닌 유감표명, '죄송합니다.'가 아닌 '거 안됐네!'라는 말만을 한다면, 이를 듣고 앞선 문제들을 문제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잘한 일일까. 아니다. 이것은 굴욕적인 태도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북한의 유감표명을 높게 사며 합의를 이루더니, 이를 자화자찬하고 있다. 합의 직후 북한이 보인 모습을 보더라도 이번 합의가 잘한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데 말이다. 


북의 유감표명이 사실상의 사과라던 정부의 입장과 북한 수뇌부의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북측 대표로 이번 회담에 참석했던 황병서 북한 총정치국장은 <조선중앙텔레비전>에 출연해 "이번 접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가지고 상대 쪽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이는 경우 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짓 사실을 공표하며 우리 정부를 또 한번 업신여긴 셈이다. 


정부와 일부 언론은 남북 합의문 발표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성과를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일까? 합의문이 발표되기 전날 까지만 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의 약속이 없다면 합의는 없다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정부는 북한의 유감표명만으로 합의를 이뤘다. 이것이 원칙 있는 대응이고, 또 그 성과인가.



대북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하나다. 끊임없이 대화를 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에 대해선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 박근혜 정부는 이번 위기 상황 속에서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북한과 대화를 단절하고, 북의 도발에 철저히 응징할 것이라 말하면서도 북의 도발이 있을 때면 굴욕적인 합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박근혜 정부의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은 대북관계룰 더욱 어렵게만 한다.


사실 남북관계를 푸는 것에 급박함을 느끼는 것은 북이다. 북은 남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면 점점 더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급박함을 우리가 현명하게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북의 도발부터 합의문 발표까지 우리 정부는 무엇 하나 주도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북에게 공격받고 유감표명만으로 합의를 이루면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일까? 대화재개? 그것은 5.24조치를 해제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장병 2명의 희생과 전쟁 위기 국면에서 우리 국민이 시달렸던 불안, 증시 폭락. 그 속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정부의 자화자찬, 그리고 막연한 민간협력 약속이 전부다. 그리고 북한은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됐다. 남측에 대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고 대화를 제의한 뒤, '거 안됐수'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상황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박근혜 정부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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